지난 호 릴레이인터뷰의 주인공인 최은실 변리사가 정연심 한국아스트라제네카 개발등록부 이사에게 바통을 넘겼다. 서울약대 83학번 동기인 최 변리사와 정 이사는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다. 눈빛만 봐도 통하는 죽마고우가 곁에 있어 항상 힘이 된다는 두 사람이다.

정연심 이사는 대학 졸업 후 줄곧 제약업계에만 종사해 온 ‘제약통’이다. 대학 졸업 후 여러가지 진로를 놓고 고민하다 다양한 사회경험을 하고 싶은 마음에 제약업체를 택한 것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에는 한국 아스트라 시절인 1992년 입사, 합병 과정을 지켜보며 15년을 근속했다.

지난 2004년 이사로 승진한 이후 정 이사는 복지부, 식약청, 심평원 등 관련 기관과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제품허가에서 프라이싱까지 주로 대관업무를 맡고 있다. 약업계의 환경변화를 가장 먼저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일의 가장 큰 장점.

“흔히 여성에게 대관업무는 잘 맞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요. 식약청만 해도 관련 부서의 공무원들 대부분이 여성인걸요.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여성파워를 실감하고 있죠.”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굴지의 외자제약사에서 중역으로 자리 잡은 그녀를 보면 거침없는 커리어우먼이 연상되지만 정 이사에게 사회생활이 처음부터 만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로컬 제약사에서 말단사원부터 시작했던 신입 시절엔 뿌리 깊은 남녀차별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삼켜야 했던 적도 많았다고. 남녀가 각각 다른 월급이며 승진연한은 물론이고 여직원에게만 유니폼을 입히는 관행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미스 정’이라는 호칭도 들어 봤어요. 전문직능인으로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기대했던 것과 현실이 너무 달라 피해의식에 시달릴 정도였어요.”

사실 정연심 이사의 또래들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남녀차별에 맨 몸으로 맞서 대응한 첫 번째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똑같은 아픔을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정 이사는 불합리한 관행 앞에 실력으로 당당히 맞섰다. 여성과 남성이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되 일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프로임을 보여준 것이다. 정 이사와 같은 열혈여성들의 눈물어린 노력과 여성인력의 증가, 사회의 인식변화가 맞물리면서 약업계에서 여성의 지위는 점점 높아져 갔고 이제는 아무도 정 이사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편견을 갖지 않는다.

“4년 전부터 여성 MR도 등장했어요. 자기표현력이 좋고 전문성도 뛰어나 무엇보다 우리 회사에 필요한 인력들이죠. 남녀구분 없이 모든 직원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조직구조가 갖춰진 것이죠. ”

다만 제약회사 내에서 약사들의 입지가 전과 달리 많이 위축된 것은 약사 출신 중역인 그녀에게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과거에는 세일즈마케팅을 대부분 약사들이 담당했지만 이제는 그 자리를 MBA 등 타 전공자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개국 일변도의 취업구조가 만들어낸 결과죠. 입사 면접시 약사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대화 스킬이나 프로근성이 타 전공자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제약업계에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약사라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확고한 직업관과 전문성으로 무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그런 후배약사들이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