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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촌 은평소방서 현장 대응단 구조대장“나의 주황색 제복은 언제나 시민 곁에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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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25  09: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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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황색 제복은 언제나 시민 곁에 있을 것“

화마로 잃은 자신감, 봉사와 시민들의 사랑으로 극복

 

   
▲ 이성촌 은평소방서 현장 대응단 구조대장

내 고향 장수, 그리고 그 보다 더 깊숙이 자리한 다리건네 응달북치,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이곳, 지명이 말해주듯 이곳은 오지 중에 오지 아침 늦게 해가 뜨고 오후 일찍 해가 지는 곳.

가난한 농군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보릿고개라는 것도 겪어봤고 그 가난이 싫어 빨리 어른이 되어 그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소위 말하는 골목대장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보다 한 두살 더 많은 동네 형들 그리고 또래의 아이들 그 사이에서도 나는 항상 대장 이어야 했고, 딱지치기 썰매타기 자치기 구슬치기 등의 놀이를 할 때도 무조건 이겨야 했고, 그 중심에 내가 있어야 했다. 그만큼 승부욕도 강했고 리더쉽 또한 탁월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오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순박함이 그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도 있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상수도가 다 들어와 있지만 그때만 해도 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우물물을 길어다 밥을 지어 끼니를 해결 해야만 했었다. 한 겨울이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도록 눈이 내리기 일쑤였고 그럴 때 마다 나는 나이드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 댁에 물을 길어다 드리고 학교에 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가난한 시절의 나였지만 천성이 나보다 나은 위보다는 아래를 더 바라보며 살고자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낸 나는 뜻한 바가 있어 군이라는 곳을 지원해서 가게 되었다. 남들은 어떻게 하면 군대를 안갈까 궁리하고 흔히들 이야기 하는 빽이라는 것을 이용해 편한 보직을 찾아가고 했던 때라 군을 지원해서 그것도 보통 군이 아닌 특전사 하사관으로 자원입대 한다는 자체가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크나 큰 충격이었던 터라 그곳을 선택한 나를 막무가내로 말리셨다.

결국 내 고집을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는 앞으로 부모 자식간의 연을 끊자시며 앞으로 싸릿문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마라는 말씀을 남기시고는 등을 돌리신채 그만 특전사 입대를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되었다.

조금 더 강한 곳 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곳 ..특 ..전 ..사

실전과 같은 수많은 훈련은 죽을 만큼 힘이 들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강한 나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남들은 2년이면 끝이 나는 군 생활을 그렇게 7년 하고도 반년을 더 했으니 얼룩무늬 군복이 꽤나 매력이 있었나보다. 군 전역을 6개월여 앞둔 나는 지금의 아내와 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그때 나는 내 인생에 Turning Point를 맞이하게 되었다.

얼룩무늬 군복에서 주황색 제복으로 환복을 하기 위한 내 일생일대에 가장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얼룩무늬 군복이나 주황색 제복이나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 똑같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시민들 곁에서 그분들의 안녕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군복을 벗고 소방관이 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총 대신 연필을 들고 국어 국사 소방법규 및 실무 등 다소 생소하고 어색한 나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또 다른 인생 2막을 야심차게 열고 있었다. 그렇게 약 2년여 시간 동안 한가정의 가장으로 또 대한민국의 소방관이 되고자하는 의욕을 가지고 힘들고 고된 싸움의 주경야독을 한 끝에 결국 삼수 만에 소방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야심차게 시작한 소방관의 생활, 주황색 제복에 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현장 활동을 함에 있어서는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늘 적극적이었고 긍정적이었으며 아무리 하찮은 출동이라 할지라도 시민을 대하는 나의 얼굴은 밝은 미소를 머금고 다가섰다.

그러던 98년 12월 겨울 어느날 새벽, 00동 화재출동 시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부에 진입하여 인명검색을 하던 중 무서울 정도로 내게 달려드는 화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었다. 집채만 한 불덩어리는 내 온몸을 휘감아 그만 집어 삼키고 만 것 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밖으로 겨우 살아나온 나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이송 전신 30퍼센트 2~3도 화상으로 몇 달 여 치료를 받는 동안 그 시간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통증과의 싸움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파충류 같은 흉터 자욱을 내 몸에 남긴 채 병원을 나선 후 또 다시 시작된 화재출동은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불과 당당히 맞서 싸우던 예전의 내가 아님을 위축된 몸에서 스스로 느끼게 되었고 그때 내 인생에 최고의 슬럼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다시금 최고의 소방관으로 이끌어 주신 분들이 바로 시민들이었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가 시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역할을 할 때마다 그분들은 늘 우리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셨고 ‘119 때문에 세금 내는 것이 아깝지가 않다’, ‘119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 등등으로 우리에게 큰 힘을 주셨고, 그 사랑을 안고 다시금 일어 설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될 소방 역사상 가장 큰 엄청난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바로 2001년 3월 4일 새벽 홍제동 화재사고, 내부에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내 동료들은 하나 둘씩 그 사람을 구조하기 위하여 불길 속으로 하나둘씩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있었다.

누구는 화재를 진압하고 누구는 인명을 검색하고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 불로 달구어지고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물로 인해 약해 질대로 약해진 그 건물은 많은 소방관을 쓸어안고 그만 붕괴가 되고 만 것 이었다.

그날 비번이었던 나는 비상발령을 받고 현장에 출동하여 일반 시민이 아닌 매몰된 내 동료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건물 잔해를 걷어내고 파내고 안간힘을 썼지만 불법 주차된 차량으로 인하여 포크레인이 진입할 수가 없었고 결국 시간 지연으로 인하여 6명의 동료들을 하늘로 보내야만 했었다.

그 여섯 분 중 우리 구조대에 근무하는 선·후배가 3명, 그 중에는 나와 유난히 가까이 하던 형이 있었는데 그 형 이름이 장석찬, 그 형은 내가 화재 출동 중에 화상을 입고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누워서 꼼짝을 못하는 나의 대소변을 다 받아 내주던 그런 형이었다.

특전사 1년 선배였고 소방 동기였던 그 형의 빈자리가 내게는 너무나도 컸었다. 그렇게 내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의욕 없는 삶 지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무렵 순직한 그분들의 억울한 죽음을 대신 하기 위한 나의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전에(1997년 무렵) 한 보육원에 훈련을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거기에 있는 딸들의 생일을 챙겨주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녀석들은 내게 늘 119아빠라 불러줬고 그런 나는 이 녀석들의 생일 날 뿐만 아니라 어린이날 유치원 졸업 크리스마스 등등 기념일 때 마다 보육원을 찾아 함께 보내곤 했다.

그분들이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그리고 그분들의 몫까지 살고자 한 나의 또 다른 삶이 바로 봉사활동 이었다. 나는 주변의 지인들을 끌어들여 ‘참사랑 나눔이’라는 봉사활동 단체를 만들어 지체장애 시설에 찾아가 시설물 수리, 목욕, 음식 등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날 좋은 날에는 휠체어를 끌고 밖에 나들이를 가곤 했다.

처음에 시작 할 때는 소규모였고 미약하기 짝이 없어 힘도 들었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지금은 어느 정도 도움의 손길을 주는 이들이 있어 몇몇 군데를 후원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게 나의 본업인 출동과 부업인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나가던 몇해 전 또 다시 큰일을 겪게 되었다. 우리 서대문 구조대에 부대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타 소방서 관내 아파트 공사현장 화재 출동 지원을 나갔다가 그만 엘리베이터 개구부 안으로 추락을 하고 만 것이었다.

공사 현장이었기에 엘리베이터가 아직 들어서지 않은 빈 공간이었고 인명 검색 및 화재 진압을 하던 중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은 상태 인지라 그만 16층에서 추락을 해 정말 천우신조로 15층 펜스에 걸려 6개의 늑골만 부러진 채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추락할 때 충격으로 헬멧과 무전기를 떨어 뜨리고 말았는데 나중에 그것들을 찾아온 곳이 지하 3층 이었다는 말을 듣고 온몸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15층 펜스에 걸리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어찌 됐을까??? 정말 나는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었다. 하늘은 내게 시민들을 위한 더 많은 삶을 살아가라고 기회를 더 주시는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시민들의 부름을 받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태워진 내 30퍼센트의 안타까움 보다는 나머지 70퍼센트 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분들의 행복까지도 안겨주기 위한 마음으로 나의 주황색 제복은 이미 시민들 곁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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