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들고 다니는 영업사원

나는 서울약품의 계열사인 아세아양행에서 제약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아세아양행은 몇 가지 히트작이 있는데도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속 성장을 추구하는 회사라 항상 가격 덤핑이 있어서 약사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회사에 대한 고객들의 이미지가 좋지 않으니 새 제품을 팔기도 어려웠고, 수금도 잘 되지 않았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겨주기는커녕 불청객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약사들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금 바쁘니 나중에 오세요.”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는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그나마 이런 반응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뭐하러 또 왔어?” “너희랑 거래할 생각 없으니 오지 마.” 이런 말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약사들에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니 아무리 좋은 상품이 있어도 팔 수가 없었다.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영업을 해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객인 약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반갑고 기다려지는 영업사원이 되려면

‘물건을 파는 것보다 나를 반가운 사람, 기다려지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약국에서 반기는 사람이 되려면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약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궁리를 하면서 다녔다. 그러다 보니 동네 구멍가게에서 파는 청소용 타월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당장 청소 타월을 몇 세트 샀다. 청소 타월을 들고 내가 맡은 구역을 다니다가 약국 간판만 보이면 들어가 청소를 했다. 어지럽게 쌓여 있는 상자를 정리해서 내다버리고, 청소 타월을 양손에 끼고 약국 구석구석을 닦아놓았다. 먼지로 뿌옇게 된 유리창도 닦고, 진열장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놓았다.

“아니 이 사람, 뭐하는 거야?”

▲약국은 약사에게 삶이고, 축복의 공간이다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네.”

멀쩡하게 생긴 제약회사 직원이 아무 말 없이 청소만 하고는 후다닥 가버리니 약사들은 처음에 좀 당황한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세아양행 이희굽니다.” 라고 꾸벅 인사만 하고 열심히 청소했다.

한 약국에서 10~15분 정도 청소하고는 다음 약국으로 가서 또 그렇게 청소를 했다. 청소하고 더러워진 타월은 개울가에서 빨아 썼다. 집에서 걸레 한 번 잡아본 적 없지만, 부지런히 청소를 하다 보니 서툰 걸레질이 어느새 능숙해졌다.

또 여러 약국에서 상품 정리를 하다 보니 물건을 효과적으로 진열하는 요령도 터득했다. 들어가기 어려운 약국은 바깥 유리창부터 청소하고 나중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부담스러워하던 약사들도 내가 갈 때마다 약국이 깨끗해지니 점점 좋아하는 눈치였다. 특히 여자 약사들이 나를 반가워했다. 여자 혼자 약국을 경영하다 보면 남자의 일손이 필요한 일이 있는데, 내가 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도움을 청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와 누나를 생각하면서 세심하게 부탁한 일을 해주었다. 무거운 물건이 있으면 옮겨주기도 하고, 망치를 들고 못질도 했다. 또 형광등을 갈아야 할 일이 있으면 당장 갈아 끼워주었다.

이렇게 약국 일을 돕다 보니 내 머릿속엔 약국 그림이 훤하게 그려졌다. 어느 약국에 뭐가 필요한지, 지역별로 약국별로 마케팅 지도가 나도 모르게 그려지고 있었다.

●나의 자랑스러운 발

어떤 이유에서건 나를 기다리는 약국이 조금씩 늘어났다. 가끔 급한 일이 있어 가야 할 날 못 가면 “이희구 씨, 목요일에 안 오면 어떡해? 그날 물건 정리 못 했잖아!” 이렇게 말하는 약사들도 생겼다.

당시 내 구역인 관악구에는 약국이 모두 200개 정도 있었다. 이렇게 청소를 하면서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돌아다니니 하루에 적게는 40곳, 많게는 50곳까지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니 200곳을 모두 다닌다 해도 적어도 2~3일에 한 번은 방문할 수 있었다.  꼭 거래해야겠다는 약국은 매일 방문하다시피 했다.

보통 영업사원들은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하루 15곳 이상은 찾아가기 힘들다고들 했다. 그런데 나는 하루 40~50곳을 다녔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서너 배 정도 더 많이 움직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매일 아침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약국을 방문할 수 있을지 생각해서 효율적인 동선을 짰다. 아침 9시에 노량진에서 시작해서 장승백이, 봉천동, 신반포를 거치면 40~50개 약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동 시간도 아까워서 식사 메뉴는 무조건 빨리 먹을 수 있는 걸로 정했다. 대부분 자장면 곱빼기로 때웠다. 밥을 먹으면서도,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온통 다음에 방문할 약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약국 한 군데라도 더 가서 약사 한 분이라도 더 만나보자고 생각하니 1분 1초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날 방문한 약국에 관한 자료를 나름대로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잠잘 시간이 되곤 했다.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못한 터라 잠자리에 들면 정말 죽은 사람처럼 곯아떨어졌다.

퉁퉁 붓고 부르튼 발에 찜질이나 마사지라도 해주면 좋았으련만 일만 생각하느라 내 몸은 돌아볼 생각도 여유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벌떡 일어나 신발 바닥과 양말에 초를 칠하고 출근을 했다.

워낙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구두 굽을 갈 새도 없어 구두가 형편없이 망가졌다. 굽을 갈아주면 되는데, 그 시간도 아까워서 미루다가 구두가 망가지곤 했다. 뒤틀린 신발을 신고 온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새끼발가락에 티눈이 생겼는데,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참고 다니다가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동네 병원에 가서 티눈을 잘라냈다. 의사는 이것도 수술이니 며칠 쉬지 않으면 발이 기형이 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일에 미쳐 있던 나는 의사의 충고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수술 직후에는 발이 퉁퉁 부어서 발이 신발에 들어가지도 않아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그런 발을 하고서도 하루 10시간씩 다니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발에 무리가 갔고, 발 모양도 이상하게 변해갔다. 다행히 수술 후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발 모양이 이상하게 변해 나중에 고생을 많이 했다.

●꼴찌와 일등의 차이  

▲발로 뛴 하루, 24시간도 부족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을 해도 처음부터 쉽게 거래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주 얼굴을 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신뢰도 생겨났다.

누군가 자기 약국을 이렇게 열심히 청소하고 정리해주는데 주인이라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청소 타월을 양손에 끼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마음 약한 여자 약사들부터 조금씩 거래를 해주었다. 좀더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약사들이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뭘 팔아주면 좋겠어요?”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거요?”

약사들에게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시작한 청소였는데, 내가 약사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보니 그들도 나를 어떤 식으로든 돕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고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약국 청소까지 하며 열심히 살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느 날부터 신규 거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청소 타월로 약국 청소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평균 하루 2~3개씩 신규 거래 약국이 생겨나더니 두세 달이 되자 대부분의 약국이 신규 거래를 텄다.

그때부터 나는 동기들보다 적게는 3배, 많게는 5배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곧이어 아세아양행과 서울약품의 전국 영업사원 3백 명 중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영업부는 물론이고 회사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희구 이 괴물,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내 시작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꼴찌가 어느 날 갑자기 일등으로 치고 올라왔으니 괴물 소리를 들을 만했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