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의 탑을 찾아서 ⑧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에 가면 많은 이들이 낙화암이 있는 백마강과 부소산 언저리를 돌아보는 것으로 여행을 마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사전 조사를 잘 하지 않는 여행 습관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실제로 부여는 찬란한 문화 강국 백제의 옛 수도라는 명성에 비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들이 적어 돌아볼 곳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왕 부여를 찾았다면 결코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들러볼 곳이 두어 곳 있다. 그러한 곳으로 필자는 언제나 두 곳의 중요한 문화유적을 추천한다.

하나는 수도를 방어하던 백제 山城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성흥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 ‘무량사’이다.

성흥산성은 성의 형태를 공부하는 재미는 젖혀놓더라도 부여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성 정상의 전망이 일품이고 무량사에서는 백제 양식으로 지어진 독특하고 멋진 오층 석탑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고자 하는 탑이 바로 이탑, ‘무량사오층석탑’이다.

무량사는 부여 중심가에서 보령쪽으로 약 30km 쯤 떨어진 만수산 기슭에 자리 잡은 유서깊은 고찰이다. 만수산의 우거진 숲 속에 안기듯 둥지를 튼 풍경이 우선 일품인데다 절의 규모도 크고 당당하다. 규모로 따지면 부여는 물론 서천 보령 등 인근 도시를 통틀어서도 가장 큰 규모일 것이다. 무량사는 조선초기의 천재적인 지식인 매월당 김시습이 전국을 유랑하다 마지막 숨을 거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김시습의 초상화와 부도를 비롯,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무량사오층석탑도 그 ‘독특한 문화재’ 중의 하나이다.

오층석탑은 법당인 극락전의 정면에 웅장한 자태로 당당하게 서 있다. 층수가 일단 높을뿐더러 크기도 굉장하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는 극락전도 예사 건물이 아니다. 보통의 법당이 단층 건물인데 비해 극락전은 외양이 2층이다. 우리나라의 다층 건물은 겉으로 보아서는 다층이지만, 안에서 보면 천정까지 휑하니 뚫려있는 단층 건물이다.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외양을 웅장하게 보이기 위한 장엄수법의 하나인 셈이다. 이런 건물은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등 국내를 통틀어 단 몇 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만약 이렇게 웅장한 2층 건물 앞에 왜소한 탑이 서 있으면 과연 어울리는 광경이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오층석탑의 웅장함이 지닌 미덕은 무엇보다도 그 앞에 서 있는 법당의 위용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한편 세부적인 모양을 뜯어보면 이탑은 ‘석가탑류’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일반형 석탑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석가탑을 닮은 것이 아니라 부여 정림사지에 서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을 훨씬 더 많이 닮아있는 것이다.

정림사지에서 완성된 백제탑의 가장 큰 특징은 일직선에 가까운 수평으로 뻗어나가다가 모서리 부근에 이르러 살짝 위쪽으로 반전을 하는 지붕돌의 단면과 두어층의 큼직하고 원만한 층급으로 마무리 된 옥개받침의 형태에 있다. 무량사오층석탑에서 바로 이러한 특징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의 전통을 이은 이른바 백제양식의 탑은 충청도와 전라도 일원, 즉 옛 백제 땅을 중심으로 후대에도 계속 세워져 현재 몇 기가 남아있는데 무량사오층석탑은 이들 현전하는 백제양식의 탑 중에서도 조형적으로 가장 우수한 탑으로 꼽히고 있는 걸작이다.

탑은 백제 양식의 특징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더욱 간략화된 옥개받침의 형태나 낙수면의 기울기 등에서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신라탑, 즉 일반형 석탑의 면모 또한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신라탑과 백제탑의 양식상의 특징이 조화롭게 절충된 고려초기의 우수한 석탑인 셈이다.

높이에 비해 사뭇 널찍한 몸돌, 낮게낮게 위로 이어진 적절한 체감비율로 천년을 더 가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을 주고 있다. 탑 꼭대기에는 노반, 복발, 앙화의 순으로 얹혀진 상륜부의 일부가 남아있다. 1971년의 해체 보수 공사 시에는 1층과 3층 5층에서 금동삼존불과 금동보살상을 비롯한 화려한 사리구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를 찾을 일이 있다면 만수산의 그윽한 정취가 감도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사찰 무량사를 찾아 백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이 웅장한 탑을 만나고 갈 일이다.< 저작권자 © 약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