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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아름다운 숨결(20)‘茶山학문’ 절정이룬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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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5.02  18: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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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발길을 따라서⑤ - 茶山四景

다산초당의 주요 건물들을 둘러 보았으면, 이젠 좀 더 꼼꼼하게 초당 주변을 살펴 볼 일이다.

우선 초당 본채를 뒤쪽에서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는 ‘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자는 다산이 직접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새로운 거처를 수호하듯 둘러싼 이름 없는 바위에 이름을 지어준 것 같다. 또 초당 뒤편의 왼쪽 귀퉁이에는 작은 샘이 하나 있다. 다산이 남긴 글에 의하면 본래는 물만 촉촉히 젖어있는 곳이었는데 직접 파보니 맑은 물이 돌 틈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샘이 바로 ‘藥泉’이다. 차를 유난히 좋아했던 다산은 이곳의 물을 길어 차를 우렸을 것이다. 다산은 이 약천에서 나는 물을 이렇게 예찬한 바 있다.

“담도 삭이고 묵은 병도 낫게 하는 약효는 기록할 만하고/ 틈내어 차 끓이니 이 아니 즐거운가.”

초당 마루 바로 앞에는 마치 작은 찻상을 연상시키는 평평한 바위가 버티고 있다. 생김새와 위치로 보아 누군가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본래부터 있었던 바위라고 한다. 다산은 이 넙적한 돌을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이용했다. 약천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을 길어 이곳에서 차를 우렸던 것이다. 이 돌이 ‘다조’다.

초당의 왼편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만든 작은 연못이 있다. 다산이 직접 땅을 파고 돌을 날라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의 흔적이다. 다산이 남긴 글에 따르면 1809년 경 윤단 처사의 아들 윤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에 왔다가 ‘사람을 닮은’ 신기한 돌을 발견하고 이 돌 수십개를 가져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산은 손수 조성한 연지석가산의 모습에 저으기 만족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바닷가의 괴석 모아 산을 만드니/진짜 산보다 만든 산이 더 멋있구나//가파르고 묘하게 앉은 삼층탑 산/오목한 곳 모양 따라 한 가지 소나무를 심었네 (중략)//산속의 샘을 끌어다 빙 둘러 만든 연못/ 고요히 바라보니 물밑에 푸른빛 겹겹이 어리도다”

이러한 묘사를 바탕으로 짐작컨대 연지석가산은 작은 연못 한 가운데 괴석으로 쌓은 인공 섬이 들어앉은, 매우 운치있는 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연지는 다산이 바닷가에서 가져왔다는 사람 닮은 산이며 소나무가 심어진 인공 섬 따위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연못으로 남은 기록을 충분히 참고해 옛 모습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다산은 앞서 소개한 ‘정석’ ‘약천’ ‘다조’ 그리고 ‘연지석가산’을 ‘茶山四景’ 다산(다산은 정약용의 호이자 초당이 있는 만덕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의 네가지 빼어난 경치라고 이름 붙이고 이를 소재로 한 시를 짓기도 했다.

어쨌든 다산은 이곳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안정된 마음으로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이로부터 유배생활이 끝날 때까지 만 11년 동안 이곳에 머물었는데,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이 모두 이 기간동안에 완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다산초당은 다산의 위대한 학문이 절정을 이루어 낸 요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 초당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한 곳 더 들러야 할 곳이 남아있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700미터쯤 가면 만나게 되는 다산유물전시관이 바로 그곳이다. 진품 유물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다산의 생애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꾸민 여러 가지 자료들이 썩 훌륭하다.

다산초당에서 자신의 방대한 학문의 기둥을 거의 완성한 다산은 1818년 가을, 기나긴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꿈에 그리던 자신의 고향 경기도 마재로 돌아오게 된다. 강진에 오기 전 경상도 장기현에서 보낸 1년 남짓한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18년만의 귀향인 셈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57세, 이미 초로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60세 되던 해, 스스로 墓誌銘까지 지어 파란만장했던 삶을 정리했다. 이후 자신의 저술을 다듬고 보완하며 노년을 보내다 75세가 되던 1836년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뛰어난 학자이자, 다수 민중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사심 없이 포기하려 했던 양심적인 지성이었다. 강진은 이 위대한 천재의 고독한 삶의 족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다산 정약용의 발길을 따라서-끝)

글/서조(여행작가)< 저작권자 © 약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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