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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아름다운 숨결(16)茶山학문 영근 ‘고독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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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4.06  14: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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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발길을 따라서① - 강진

조선 후기 實學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위대한 실학자 茶山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 땅을 밟은 것은 1802년 11월 말,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이른바 ‘신유박해’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천주교 탄압사건에 휘말려 돌아올 기약 없는 귀양길에 오른 ‘대역죄인’의 몸으로서였다. 같은 날 흑산도로 유배되는 작은 형 약전과 나주성 밖 북쪽의 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뒤 강진 땅을 밟은 이후, 다산은 무려 16년 동안이나 이 까마득한 남쪽 끝 고장에서 고독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재이면서도 남달리 부지런한 선비였던 그는 그 기나긴 유배기간을 울분에 싸여 술만 들이키거나 안빈낙도로 헛되이 보내지 않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치열한 자세로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면서 고독한 세월을 견뎌냈다.

분명 이 기간은 다산의 삶에서 가장 불행하고 힘겨운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후세의 역사에 영원히 빛바래지 않을 빛나는 자취를 남긴 시기이기도 했다. 실로 다산이 남긴 방대한 학문적 업적의 거의 대부분이 이 기간 동안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산 정약용이 이론의 여지없이 ‘실학의 최고봉’이라면 강진은 그의 깊고도 넓은 학문이 깊은 고독 속에서 여물고 개화한 공간적 배경인 셈이다.

오늘날의 강진은 최상품의 고려청자가 생산되던 ‘청자의 고향’으로 혹은 무위사 극락전, 월남사지 모전석탑 등으로 대표되는 국보급 불교유물이 남아있는 역사의 고장으로 답사객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남도 답사 1번지’라는 강진의 명성에 가장 큰 무게를 더하고 있는 것은 역시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이 땅에 남겨놓은 흔적들이다.

그래서 강진 여행에서 가장 의미있고 뜻깊은 여정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남해의 서정적인 바다풍경이나 굵직한 역사적 유적이 아니라 강진 땅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다산의 체취와 흔적을 따라가는 코스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약 4-5회에 걸쳐 강진 땅에 남은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독자와 함께하고자 한다.

조선 후기의 가장 잔혹한 천주교 박해사건이었던 ‘신유박해’는 외형상으로는 왕조의 통치이념 수호 차원에서 자행된 종교탄압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뛰어난 개혁군주 정조 임금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다시 정권을 잡게 된 수구세력(노론)이 정조와 함께 왕조의 개혁을 주도한 개혁세력(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살벌한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상 대대로 남인 계열에 속해있던 정약용 일가는 이 사건으로 인해 가문 전체가 풍비박산이 되는 비극을 맞는다. 친형인 약종과 매형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작은형 약전과 자신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기약없는 유배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때 정약용의 나이 40세, 막 불혹의 고개에 올라선 무렵이었다.

당시의 강진은 耽津이라 불렸다. 탐라, 즉 제주도로 가는 나루터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지금도 강진의 다른 이름으로 남아 있어 강진읍 길거리에 늘어선 가게의 상호 등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름에서도 보듯이 당시의 강진은 제주도와 가깝게 통하는 바닷가 고장으로 해안 지방 특유의 습한 기후에다, 다산의 회고에 의하면 뱀과 지네 등 벌레가 많았던 척박한 시골이었다.

게다가 정약용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리가 없는 순박한 강진 사람들은 제 고장에 발을 들인 ‘큰 죄인’을 무척이나 야박하게 대했다. 그가 머무는 집의 대문을 부수거나 담장을 헐어버리고 달아나는 일이 허다해 아무도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으려 했다.

결국 그는 강진읍성 東門 언저리에 있는 한 주막집 노파의 호의로 어렵사리 그 주막의 골방에 거처를 정할 수 밖에 없었다. 술 손님들의 소란으로 밤낮으로 시끌시끌했을 이 동문 밖 주막의 골방이 다산이 강진에서 자리잡은 첫 번째 거처였다.

지금의 강진 군청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을 어귀에는 ‘동문안 샘’이라는 옛 우물이 있는데, 바로 그 부근이 다산이 머물렀던 주막집 자리다. ‘동문안 샘’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강진읍성의 東門 안쪽에 있는 우물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물은 지금도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다산이 머물었던 집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단지 다산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라고 쓰여진 돌 팻말만이 그 옛날 다산이 머물던 시절의 풍경을 아련히 상상하게 해 주고 있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캔 커피 하나를 사들고 샘가에 걸터 앉아 문득 다산이 그 무렵 쓴 것으로 보이는 한 편의 시를 생각해 낸다.

흩날리는 눈 같은 북풍에 떠밀려/남쪽 강진 땅 주막까지 왔네.../습기 많고 따뜻한 기온은 겨울 옷 벗게 하고/마음에 근심 많아 밤마다 술만 느는구나...

(다음호에 계속)

글/서조(여행작가)< 저작권자 © 약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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