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中 정원(한석규분)의 독백

현대사회 대부분의 제품들이 아주 매일같이 속도전을 즐기듯 쏟아져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작품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잠깐동안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금새 뒤로 잊혀지기 십상입니다. 쏟아지는 영화의 홍수, 과장된 마케팅으로 범벅이 된 인터넷과 잡지 속에서 영화감상 역시 신작을 얼마나 빨리 보느냐를 경쟁하는 듯 싶습니다. 그리고 곧 잊혀 지지요.

쏟아지는 것들의 홍수 속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앞만 내다볼 뿐, 뒤를 돌아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이번엔 끝이 이미 정해져 있는, 그래서 끝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보다 뒤를 돌아보고 남은 것들을 정리하는 여운을 주는 영화를 보고 싶어졌습니다. 답은 오랜만에 처음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보았을 때의 아련함과 세상에 대한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8월의 크리스마스’를 꺼내 보았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이제 남은 시간들을 정리하며 보내는 사진사 정원(한석규분). 그런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다가옵니다. 주차 단속원 다림(심은하분)이 단속사진을 맡기러오면서 둘 사이에 감정이 피어납니다. 삶의 끝이 보이는 순간 정원은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는 가슴 아플 만큼의 장면들이 계속 나옵니다. 자신의 영정사진이 예쁘게 안 나왔을까봐 다시 찍으러 온 할머니 이야기.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제 홀로 남겨져 비디오도 제대로 못 보실 아버지 때문에 비디오 보는 법을 설명해드리려다 결국 화를 내고 나가버리는 장면.

그리고 정원과 다림, 두 주인공이 함께 작은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어떻게 이런 작은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마저도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요?) 정원이 병원에 실려간 줄 모르고 괜히 연락 없는 상황에 심술나서 사진관에 돌 던지는 다림의 모습.

정말 모두가 명장면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렵고 피하고픈 고통의 대상으로만 보지만 실제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모습을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도 죽음을 앞둔 한 소매치기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이 죽음에 대해 어떤 숙명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사랑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뿐이라고 생각하는데 반해 보다 젊은 주인공인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뇌종양인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데 대한 부담을 털어 버릴 수 있는 건 역시나 젊은 세대의 쿨함이겠죠. )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의 따뜻하고 밝은 시선.

남겨질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모습을 보면서 요즘의 내 삶이 너무 많은 짜증과 미움들로 가득찬 게 아닌가 돌아보았습니다.

예전에 유언장 비슷한 것을 쓰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내가 만일 1주일 뒤에 죽는다면…’이란 가정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하고픈 말을 적는 것이었는데, 아마 그때 정말 제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소중히 여기는 것, 나의 죽음에 가장 아파할 사람, 어제 다툰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일상에선 쉬이 생각나지 않던 좀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영화를 보면서 그때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고, 또 같은 숙제를 스스로에게 내보았죠. 답은 비슷하였습니다. 나 자신보다는 가족과 친구들을 더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미안함이 드는 친구에게 먼저 전화해보기도 하고, 아버지에겐 괜히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쑥스럽게 꺼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가슴한쪽이 따뜻하게 가득 차오는 것 같았습니다.

일상의 속도 전에서 잠시 빗겨서 내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을 잠시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필자 소개 우동준 약사는 성대 약대 96학번으로 경남 거창에서 근무약사로 일하고 있으며 약사 커뮤니티인 약준모에서 바이∼앨리!! 라는 필명으로 문화 관련 글들을 연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약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