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山寺)의 정적을 깨트리는 풍경은 한 주먹의 바람만으로도 울려퍼지며 작은 울림은 사찰의 명운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한 개인이나 단체의 사회 봉사활동도 사찰의 풍경소리처럼 끊임없이 세상에서 소외받고 있는 이들을 위한 한 걸음이리라.

지난주 릴레이 인터뷰의 주인공 류순섭 약사가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불자약사보리회의 회장 백경숙 약사에게 바톤을 넘겼다.

향기라는 것은 은근한 냄새와 독특함으로 사람들의 후각을 끊임없이 자극해 감각에 무디어진 생활을 깨트린다. 한약은 예로부터 우리의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생물의 잎·줄기·뿌리·열매나 동물의 신체 일부를 말리거나 찌는 등 자연스러운 가공법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 향 또한 몸에 이롭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경동약령시는 우리나라 최대의 한약 집산지로 이곳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약사들은 어느 곳 보다 한약에 대한 자긍심이 높고 약방과 도매업소들로 북적대는 한약시장에서 생존의 법칙을 몸소 배워나가고 있다.

경동 약령시의 1번 구역을 들어서다 얼마 못 들어가면 3층에 ‘지예당 한약국'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선다. 한약을 찾는 사람들로 발 딛을 틈 없는 경동 약령시에서 3층에 약국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시장의 법칙을 무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1986년 경동 약령시에 처음 들어와 10년 전 백경숙 약사가 처음 이 약국을 열었을 때만 해도 주위의 시선은 이를 ‘모험'으로 쳐다보는 시각이 역력했다. 지금은 경동 약령시에만 3층 이상 약국이 2∼4곳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처음 개업할 때 주변의 시각은 ‘우려' 자체였지만 제 자신은 약국도 하나의 오피스텔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조용하고 아늑하다보니 오히려 환자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치료에 도움이 되는 환경이지요".

동덕약대 70학번으로 대학 조교를 거치고 결혼생활 후 수년간의 공백이 있던 백경숙 약사가 지난 86년 경동약령시로 들어와 한약을 택하게 된 것은 그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한약 냄새를 접하고 살았던 백 약사는 졸업 후 약국 근무약사로서 1년 정도 양약을 다루기도 했지만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운명처럼 선택했던 경동 약령시는 한약에 관한한 살아 움직이는 교과서였다. 각종 한약재가 날마다 새로이 들어오고 약방·도매업소 등 밀집되어 있는 거래상에서 올라오는 소식은 한약에 대한 궁금증으로 목말라 있는 백 약사에게는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던 것.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약사가 정말 한약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몸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히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분업 이후 약사들의 한약 취급이 줄었지만 결코 약사 손에서 떠나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상의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백경숙 약사는 “가장 중요한 치료는 마음과 정성"이라고 강조한다. 걷는 것이 취미인 백 약사는 “많이 걸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저력으로 한약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고.

지난 7월부터 불자약사보리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백경숙 약사는 현재 저소득 층과 노숙자·외국인들을 위한 무료투약 봉사활동으로 바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월 둘째주 일요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투약 사업은 불자약사보리회의 주요 사업으로 4년간 무료투약을 받은 이들만 해도 7만여명 가까이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금촌의 자비정사에서 스리랑카인 등 외국인과 노숙자 등을 위한 무료 투약 사업에도 나서고 있다.<후원 문의: 02)959-0089, 후원계좌 : 국민은행 291-01-0008-821(김미경)>

1남1녀를 슬하에 둔 백경숙 약사는 글 욕심도 한약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강하다. 남편과 연애시절부터 써온 일기는 30년 가까운 생활동안 아이들의 육아일기를 포함, 노트만 수십권에 달한다고.

경동 약령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세월동안 시장에서 도라지를 파는 할머니에서부터 거부(巨富)들의 삶을 들여다본 시간이 도(道)를 닦는 기분이었다는 백 약사의 봉사활동이 늘 즐거움이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