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지키기 20년 ‘세무박사’된 67학번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약국이 있다. 모든 약국이 처방전을 쫓아 노른자위로만 몰려간다면 소화제 한 알을 사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환자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고층빌딩 그늘에 가려 찾기조차 쉽지 않은 ‘태평로 약국’은 분업시대의 황금입지와는 거리가 먼 속칭 ‘돈 안 되는 약국’ 이지만 그 곳을 필요로 하는 단 몇 명의 환자를 위해서라도 꼭 존재해야만 한다고 김응일 약사는 생각한다. ‘세무 도우미’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약사회 개혁과 분업 정착을 위한 소신있는 행동 덕분에 따르는 후배 들이 유독 많은 김 약사. 김 약사를 추천한 지난 주 인터뷰 주인공 오성곤 약사도 그중 한 사람이다.

오피스 빌딩만 즐비한 가운데 근처에 변변한 의원이나 주택가도 없고, 밤이 되면 썰물처럼 사람 들이 빠져나가는 태평로는 약국이 자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다. 그나마 분업 이후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의약분업이 약사 사회를 분업의 수혜자와 박탈자로 이분화시켜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제도 자체는 이상적이었지만 현실과의 괴리를 좁힐 수는 없었던 것이죠.”

김응일 약사는 분업 이후 담합 등 탈법적 수단을 동원해 호황을 누리는 약국이 있는가 하면 상당수의 동네약국 들은 악성재고와 만성적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성분명 처방이나 대체조제 확대 등 담합없이도 약국을 경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또한 요원한 일이죠.”

그러나 김 약사는 20년이나 지켜온 이 자리를 앞으로도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태평로 약국이 없어지면 불편을 겪어야 할 환자 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상용처방약을 철저히 분석해 약품구비의 슬림화를 꾀하고 장기반복처방환자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등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환자의 편의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 약국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네약국 들이 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보호장치 들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무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약국의 생존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했던 개국초년병 시절, 세무조사를 한 번 받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두꺼운 ‘세법’ 책부터 뒤졌지만 관심을 갖고 꾸준히 공부한 끝에 세무사 부럽지않은 지식을 갖추게 됐다. 지금은 약사 사회의 유일무이한 세무전문가로 전국에서 상담문의가 쇄도한다.

“약국의 세무는 일반 세무 업무와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많은 약사 들이 세무사에 모든 것을 일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담을 하다보면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낸 경우가 허다합니다. 약국세무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것이 이유지요.”

약국의 세무 서비스는 “창조적이면서 사전과 사후를 망라하는 토털서비스”여야 한다는 것. 특히 소득세와 부가세 신고가 있는 달에는 팩스와 전화로 밀려드는 상담 요청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봉사 차원에서 무보수로 진행하는 일이라 혼자 힘으로는 벅차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약사 들이 직접 세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관심을 유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배고픈 아들에게 고기를 잡아주는 대신 낚시법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심정이랄까. 대한 약사통신에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는 세무관련강의는 개국가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질문과 사례를 꼼꼼이 모아 책으로 묶어 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모든 약사가 자신처럼 ‘세무박사’가 되어 직접 세무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김 약사의 소망이다.

요즘 김응일 약사는 후배 들에게 보다 좋은 환경을 물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고 한다. “후배 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그나마 우리 같은 기성 약사 들은 태평성대도 누려봤죠. 힘든 환경 앞에 놓여 있는 젊은 후배 들은 원죄가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선배 들의 책임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후배를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때문일까. 대학교수에서 연구소장에 이르는 쟁쟁한 동기(서울약대 67학번)들 앞에서도 김응일 약사의 이름은 기죽지않고 더욱 빛나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