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약사회 15년 붙박이 반장 맡은 ‘문학소녀’
서울 동작구 사당동, 유흥가와 아파트단지가 혼재하는 좁고도 분주한 골목에서 엄계숙 약사를 만났다. 엄 약사는 30년전 이 곳에서 개국약사로서 첫 발을 내딛은 이후 줄곧 한 자리만을 지켜온 터줏대감. 그래서 이제 이 곳은 지나가던 동네아낙이 장바구니를 맡겨놓기도 하고, 드링크 한 병과 함께 세상사는 이야기가 오가기도 하며 약국 그 이상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하는 중이다.

약국은 엄 약사 스스로 처음이자 마지막 약국이라 말할 만큼 애정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모든 것이 작고, 고풍스러우리만큼 낡아서 언뜻 돈벌이와는 담을 쌓은 약국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 약사는 이 조그만 약국을 통해 자수성가에 준하는 개가를 이룰 만큼 이재(理材)에도 밝은 인물이다. 노하우는 바로 부화뇌동하지 않는 ‘한결같음’에 있다. 소신을 가지고 자기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처방조제는 하루 10건 남짓이지만 한약과 OTC, 건식을 위주로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인 다각화를 꾸준히 시행하고 있다. 약사와 환자의 관계를 넘어 서로 끔찍이 생각하는 동네주민들의 편애도 한몫 했다.

엄 약사는 15년째 사당1반의 붙박이 반장을 맡으면서 ‘공동체의식'을 실천해오고 있다. 약국을 잘 경영하려면 인근 주민이나 약국은 물론 의원과도 원만한 조화를 이뤄야한다는 것이 엄 약사의 생각. 지금은 먹을거리를 서로 나눌 만큼 친밀한 관계지만 이렇게 되기까지가 쉽지는 않았다. 난매약국 단속 문제로 같은 약사끼리 얼굴을 붉힌 적도 있고, 의사들의 횡포에 비참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고. 그러나 그때마다 ‘상생상존'의 논리에 입각한 원만한 해결로 엄 약사는 진가를 발휘했다.

“예전에는 반회 회원들끼리 모여 여흥도 즐기고, 공부도 함께 하곤 했는데 요즘은 다들 일에 치여 그럴만한 여유를 갖지 못 하는 것이 아쉽죠. 그러나 하부조직이 튼튼해야 모든 구조가 완성되는 만큼 반회 활성화에 남다른 사명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중대 여동문회 회원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조제 중간 나른함을 쫓기 위해 재즈 에어로빅을 즐기는 등 풍부한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는 엄약사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자랑할만한 것은 문학에 대한 애정이다. 지금까지 써둔 시만 1백여편이 될 정도.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엄 약사.

“지금 모든 약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감성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제실 안에만 갇혀 지내면 자칫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기 쉽죠. 나의 예술활동은 곧 즐거운 약국경영의 원동력이 됩니다. 일기라도 쓰면서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적어넣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