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신문
인터뷰인터뷰
약권신장의 핵심,약사의 '자아희생'약사회장.영화작가.수필가.농부의 삶은 축복이었다
이상우 기자  |  law07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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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05  12: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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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연 전 인천시약사회장.작가 약력

1991 월간문학 수필 신인상-‘동전 세 닢’

저서

1997 그거 주세요

2003 김약사의 세상 칼럼

2006 상근 약사회장

2009 펜은 칼보다 강하다

2014 진실은 순간, 기록은 영원

2018 요지경 세상만사

이력

현 인천문협 이사

현 인천지검 형사조정위원

인천시 궁도협회장

동아제약사보 ‘동아약보’,대일화학 사보 객원기자

인천시약사회보 편집위원장

수상경력

1979 전국8미리 소형영화 콘테스트 우수작품상

2014 인천시문화상(문학부분)

사회활동

2005 보건복지부장관상

2008 정부포상 국무총리 표창(마약퇴치)

2012 약사금탑상(대한약사회)

   
▲작가,전 인천시약사회 회장 김사연(사진)

2018년 7월 29일,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국민건강수호 약사 궐기대회’에 다녀왔다. 정부가 국민 편의성을 들어 편의점에 제산제 ‘겔포스’와 지사제 ‘스멕타’를 넘겨주려는 시도를 반대하기 위한 집회였다.

기온이 37도를 오르내리고 폭염을 피해 온 국민이 피서를 떠나는 절정기이다. 해서 많은 회원들의 참여에 회의적이었는데 8만 약사 중 3300여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약사회 현안을 내가 안 나서도 누가 해결해 주리라 믿고 태평성대인 회원들이 많지만 약권수호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 희생을 감수하고 청계광장에 모인 회원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울컥 뜨거운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소용돌이친다.

약사회를 위한 자아의 희생! 쉽지 않은 결단이다.

8미리영화작가, 수필가로 살다

원래 나는 엔지니어를 꿈꾸던 인하공대 공학도였지만 내 건강을 염려한 주변의 권유에 의해 약사의 길을 선택했다.

1976년에 약사면허를 획득한 후 약사로서 생활하며 늘 아쉬웠던 것이 있었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린 유명 인사의 수필을 읽을 때 의사의 글은 많았지만 약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특히 김사달 박사(1928-1984)는 독학으로 교원검정시험, 대입검정시험에 합격해 교사, 전문의 의사, 서예가, 문필가로 대성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물론 대한약사회장, 국회의장과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민관식 박사님도 거대한 버팀목으로 약사의 자존심을 지켜주셨지만 독자들은 그분을 문필가이기보다는 정치인으로 존경했다.

그것은 아쉬움의 차원을 넘어 한(恨)이 되었고 나는 수필가가 되어 약사의 명예를 빛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글이란 마음만 먹는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다. 재능을 타고나야 가능하다.

다행히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짓기에 소질을 보였고 사춘기 시절의 일시적인 문학 소년이 아닌 생활 속의 문필가가 되었다.

인하공대 시절엔 ‘석상녀’라는 소설을 학보에 연재했고, 성균관대학 약학대학 시절엔 ‘짜라투스투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서평을 학보에 실어 문과학부생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약국을 개업한 후 약사회 기관지를 통해 끊임없이 기고를 했으며 훗날 내가 직선제 인천시약사회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수필가로 등단한 것은 객지 생활을 마치고 인천의 고향 마을로 내려와 내 약국 건물에 안주한 후였다. 그 전, 서울 방화동에서 만수당약국을 경영할 때까지는 8미리 소형영화를 제작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기에 취미생활로 안성맞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시나리오를 공부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평소에 시나리오를 쓰고 일요일엔 동호인들과 영화배우를 섭외해 야외 로케를 떠났다. 촬영한 필름은 일본으로 우송해 현상을 한 후 불필요한 장면은 편집을 해 효과음과 배경 음악을 더빙했다.

‘한국소형영화동호회’사무실은 서울예술대학 근처 남산 예장동에 위치했다. 전국적인 모임인 그 동호회에도 의사는 여럿이었지만 약사는 익수약국을 경영하시던 약사님과 나 단 둘뿐이었다.

지금도 생존해 계실지 궁금하지만 하한수 감독님은 나를 키워주시기 위해 방송에 출연토록 하고 주간지에도 인터뷰 기사가 나갈 수 있도록 섭외해 주셨다. 아마도 내가 고향인 인천으로 오지 않고 서울에 살았다면 지금쯤 중앙무대에서 크게 활약하지 않았을까 가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본다.

8미리 영화로 전국콘테스트에서 수상도 여러 번 했지만 보람 있었던 것은 대한약사회 새마을사업 홍보위원으로 활동했던 시절이었다.

김포공항 입구 방화동에서 만수당약국을 개업해 3년차에 이르러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 약국 건물이 도로 확장으로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그 즈음 전남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했고 대한약사회에는 새마을사업위원회를 통해 무료투약사업을 전개하며 나에게 그 상황을 촬영해 달라고 했다.

약국 철거를 며칠 앞두고 이전할 장소를 알아보느라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나는 약권신장이라는 대의를 우선할 것인가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들여 쌓아 올린 내 약국 터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떠나야 한다는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8미리 소형영화 편집에 몰입한 덕분이었다.

결국 나는 무료투약사업에 참여키로 결심했고 당시 박용하 강서구분회장님은 구청장과 경찰서장을 만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철거를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이다음에 약사회를 위해 각 기관에 목소리를 세울 수 있는 약사회장이 되겠다고 결심했고 훗날 남동구약사회장과 인천시약사회장직을 수행하며 대관업무를 우선 사업으로 내세운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남동경찰서 자문위원, 인천지방검찰청 의료자문위원, 매주 목요일에 강력계 검사와 마약사법 등 사건을 심사했던 구속심사위원을 거쳐 현재는 형사조정위원으로 매달 2회씩 참석해 사건을 조정하고 있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너무 몰입하는 성격이다. 좋게 표현한다면 매사에 열성적이고 정열적이라는 단어가 제격일 것이다.

약국 건물을 신축한 탓으로 약국은 한가했고 그 덕분에 타이핑을 배우는 등 하고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두서없이 글을 써 왔지만 문학의 격식을 따르고 등단의 과정을 통과하고 싶었다. 해서 여의도 동아일보 내 동아수필문화교실에 등록해 매주 오창익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한편 현대수필 교실 윤재천 교수와 한국수필 교실 서정범 교수의 지도도 받았다. 그 결과 수필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어느 교수의 제자라는 계보를 추정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지도교수마다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단은 한국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등단 작품은 어린 시절 사랑을 베풀어 주신 외할머님의 죽음과 선배약사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인생무상을 느끼며 여생을 뜻있게 살아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짐한 ‘동전 세 닢’이란 수필이었다.

등단을 하기까지는 고된 행군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누군가 너무 피곤해 서있는 상태에서 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 된 적도 있었다.

늦은 저녁 수업을 마친 후 경인 전철을 타고 귀가하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 빈자리가 없어 가방을 옆에 끼고 서있던 나는 손 걸이를 잡고 잠시 천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잠시 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보다. 나는 갑자기 주저앉았고 내 모습을 보고 놀란 직장인은 내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칼럼니스트로 살다

수필가로서의 문학 활동은 독자의 한계가 있다. 보다 더 대중과 접하기 위해선 문학지 뿐 아니라 언론을 이용해야 했다. 언론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약분쟁 당시였다.

국민들은 한의사와 약사의 밥그릇 싸움이라고 했고 있는 자들이 자기 배만 채웠지 사회 약자를 위해 베푼 적이 있었냐고 성토했다. 성경에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지만 사회활동은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약사회가 대민 봉사활동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문제는 국민들이 알게 홍보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대민 봉사 사업비의 절반을 홍보비로 사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약분쟁의 실상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인천지역 언론사는 광고조차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여론이 악화된 상태였다. 그래서 광고 대신 시도한 것이 칼럼 기고였다. 이 방법도 쉽지 않았지만 인맥을 동원하고 온갖 수단을 강구해 성사시켰다. 그렇게 해서 처음 게재된 칼럼이 1996년 6월 1일자 인천일보 ‘韓·藥 밥그릇 싸움’신물···이란 제목이었다.

그 내용은 약사의 한약 취급으로 한약 가격이 1/4로 줄었고, 약사가 한약을 과학화해 한약재의 중금속을 추출했으며, 버드나무 잎으로 아스피린을 제조하고 쌍화탕과 용각산 제품을 생산했다며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한약재에 스테로이드 불법 사용을 중지하고 약사의 한약 취급시험에 대해 트집을 잡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인천일보와 남동구청 발간 소식지 등 각종 언론에 건강 칼럼과 시사성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금년까지 발간한 칼럼 수필집이 여섯 권에 이르고 있다.

‘그거 주세요’(1997년), ‘김약사의 세상칼럼’(2003년), ‘상근 약사회장’(2006년), ‘펜은 칼보다 강하다’(2009년), ‘진실은 순간, 기록은 영원’(2014년)

지역신문, 지방지, 지역방송 등 인맥을 넓히며 칼럼과 문학작품을 기고한 것은 오로지 약사의 이미지 제고를 통한 약권신장의 차원에서였다.

문단 활동과 칼럼 등 활발한 언론 활동을 인정받아 나는 2014년 제32회 인천시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해 다시 한 번 인천 약사의 위상을 높였다.

수필가와 농부로 살다

1993년부터 남동구약사회장직을 10년간 역임한 후 2004년, 직선제로 처음 실시된 인천광역시약사회장에 당선되었다. 회장으로 6년을 봉사하는 동안 약국을 폐업하고 상근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회원의 곁으로 빨리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또한 약사회의 목소리를 떳떳하게 내세우기 위해선 회장의 약국이 약점을 잡히면 안 되어서다.

상근을 하며 약사회 행사를 언론과 방송에 홍보했고 인천약사회보를 재 창간했다. 물론 내가 직접 기자가 되어 발로 뛰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회장직을 내놓고 3년간 약국을 다시 개업했지만 이웃 의원이 폐업하는 바람에 함께 문을 닫았다. 약국을 폐업하고 난 후 나는 다시 자유인이 되어 한가롭게 농사를 지으며 왕성한 사회활동과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약국을 열 땐 열심히 혈압약을 복용해도 고혈압 수치가 안 내려갔는데 폐업을 한 다음날부터 저혈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집안은 인천에서 11대를 살아오면서 농사를 지어왔기에 틈틈이 농지를 관리해야 했다. 약국을 개업할 땐 공휴일과 새벽 시간이 아니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자경(自耕) 농부로 인정을 해주지 않아 매도 시 엄청난 양도소득세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업 농부가 되어 자연과 더불어 건강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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